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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 | 기도하는 방법 -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독서법) 훈련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독서법) 훈련


김미혜 목사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영성 훈련’에서 성도들이 더욱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영성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영성훈련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첫째 그룹은 절제를 통해 훈련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한다. 그중에는 홀로 있기, 침묵하기, 금식하기, 단순한 삶 실천하기, 희생적 삶을 살아가기 등이 있다. 둘째 그룹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훈련들로서 성경연구, 기도, 예배, 봉사, 찬양, 자백, 복종 등의 영성훈련을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다양한 영성 훈련들을 골고루 경험하는 것이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성훈련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청년세대는 묵상이나 침묵 등의 영성훈련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필자가 5년간 북미주유학생복음주의 운동인 코스타에 가서 영성분야의 세미나를 인도한 결과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묵상기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렉시오디비나(거룩한 독서법) 세미나를 마친 후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이번 세미나에서 처음 훈련해 본 영성훈련이었지만 짧은 시간에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코스타에 오기까지 자신의 진로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날의 훈련 시간에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법)훈련은 한인교회에서는 낯설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속한 지방회의 목사들 모임이나 소그룹 모임 때마다 렉시오 디비나를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영성훈련이다. 지역교회가 교인들의 영적인 기질에 따라 다양한 기도 방법을 소개해야 하는 것처럼 지역교회에서 다양한 영성훈련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렉시오 디비나와 그룹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한다.

[개인적인 Lectio Divina 방법]묵상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을 선택한다(성경 대신 QT 교재를 사용해도 좋다. 기쁨의 언덕, 생명의 삶, 매일 성경, 다락방 등). 편안한 자세를 갖고 침묵하기 시작한다. 이때 내적인 침묵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호흡기도를 10회 정도 하면서 내적인 고요함이 형성되면 말씀을 펼친다.
읽기: 성경 본문을 천천히 세 번 읽는다. 이때 구절마다 깊이 생각하며 읽는다. 본문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씀을 듣겠다는 자세로 말씀에 귀기울인다. (Lectio Divina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훈련이다).
묵상하기: 본문 중에 마음에 다가오는 단어나 문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암송하며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다. 이때 방해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기억이나 생각들은 나의 존재의 일부분인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묵상한다.
기도하기: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라. 나를 사랑하고 무조 없이 받아주시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라. 말씀의 묵상 동안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하라. 말씀을 통해 주신 축복과 생각의 변화를 주신 것들을 말씀드리라.
안식하기: 이제 묵상도, 기도도 멈추고 단순히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쉰다. 때로 하나님께서 다시 묵상으로 이끌어가시면 말씀을 묵상한 후에 다시 안식으로 돌아간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다. 모든 이성적인 활동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쉬는 동안에 성령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치유해 주신다.



[그룹 Lectio Divina 방법]
Lectio Divina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묵상하는 시간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Group Lectio” 훈련으로 소그룹 모임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룹일 경우 4-8 명이 적합하다.첫 번째 성경 본문 읽기: 그룹원들과 함께 성경 본문을 읽는다. 이때 첫 번째 봉독자가 2회 같은 본문을 읽는다. 첫번째 읽기에서는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문장을 침묵 속에서 묵상한다. 5분 정도의 침묵 시간이 끝난 후에 각자가 마음에 와 닿은 단어와 문장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읽기: 두번째 봉독자가 같은 성경 본문을 읽는다. 이때에는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나 이미지를 살피도록 인도한다. 말씀 읽기 후에 2~3분간 침묵하고 각자가 느낀 점이나 깨달은 것을 돌아가며 나눈다.
세 번째 읽기: 두 번째 봉독자가 세 번째 같은 본문을 천천히 읽는다. 이때에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로 세상에 나아가서 어떤일을 하라고 하시는지(doing), 혹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being)를 묵상한다. 2~3분간 묵상한 후에 돌아가며 나눈다.
끝으로 함께 천천히 주기도문을 암송한 후에 끝마친다.

교회 안에서 여자는 잠잠하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감히 누가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밖에 할 수 없어요.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 만큼만.

살아갈수록 우리가 얼마나 제한적인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가는 것이 감사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날마다기적 이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2:13-22 성전정화 (김기석 목사님의 성서학당 요한복음 정리)

성전정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과 성전정화사건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뜻

어린양의 희생, 피흘림으로 이스라엘이 죽음을 면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과도 연관된 날이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고 시비걸던 사람들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헤롯성전은 없었다. 이미 없어졌다. 주후85-90에 쓰여졌다고 봄.

성전이 있을 때 중심은 제사장

성전이 무너지면서 회당이 세워졌고 회당의 중심은 가르치는 자, 랍비였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정화는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가 혼인 예식으로 나타남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새로운 언약이 맺어짐을 보여줌.

그 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그래서 2장에 배치되었다.

이야기를 어디에 배치하냐에 따라 낯설게 보고 새롭게 깨닫게 한다.

다른 공관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 후반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비유하시는데 종교적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신다.

겨자씨, 여인의 누룩, 어부의 물고기 고르는 것에 비유하신다.

그안에 심오한 내용이 담겨있다. 종교적언어를 사용하지만 깊이가 없다. 

우리는 거룩한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 삶에 변화가 없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인자한 하나님을 표현하신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죽으라는 뜻.

그런데 성전정화에서는 예수님이 폭력을 사용하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

이방인의 뜰 - 여인의 들 - 이스라엘의 뜰 - 제사장의 뜰 -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지성소

계층이 있다.

이방인의 뜰에서 상 행위가 이뤄졌다. 왜?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올때 먼 거리를 짐승을 데리고 올 수 없으니..

기드론 골짜기 감람산에 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그 시장을 성전 안으로 들여온다. 자리세 등을 받아서 성전이 부유해진다.

돈 바꾸는 사람들은 왜 필요한가. 성전에 내야하는 세금이 반세겔이었다. 은 5.7그램.

성전세를 내지 못하니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세겔은 성전에서만 사용하니 그것을 환전해야했다. 그것을 환전하며 수수료를 받았다.

성전이 돈벌이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제물이었다. 헌금이 그만큼 조심히 사용해야하는 이유.

받을 때는 한번 기도하더라도 사용할때는 두번 기도해라.

종교가 돈벌이에 눈을 돌리면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

이단 종파의 전도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해야할 성전이 타락한 모습에 분노하신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마가11:17 하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돈버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에 분노하셨다.

순교자 카즈 뭉크(Kaj Munk)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교회의 상징은 사자, , 비둘기 그리고 물고기였다. 하지만 번도 카멜레온이었던 적은 없다.”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거룩한 분노이다.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내쫓으시고 쏟으시고 엎으셨다. 2:15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성전이 아닌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심. 하나님의 깊이 연결되어있음. 그래서 하나님을 잘못되게 사용하고 소비하는 것에 분노하심.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장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 벌이를 위해 하는 것, 동기가 다르다.

17절  시편69:9을 인용. 시장으로 변한 종교, 죽은 종교라는 것. 성전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교회를 신의 무덤이라고 표현했던 것.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로 그들의 권위를 부정했다.

18절 대제사장이 허락한 시장을 부정한 예수님께 권위를 묻는다. 대제사장보다 높은 것은 하나님뿐인데 그럼 네가 더 높냐?

예수님의 행동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행동의 문제만 삼는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을 문제 삼는다. 예수님이 제기한 문제를 보지못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묻는다. 

19절 성전을 헐라

더이상 거룩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은 무너져야한다고 말씀하신다. 청파교회가 건물을 짓고 헌당하는 날 설교를 '이성전을 허물라' 라고 설교한 목사님. 본질을 놓치면 성전이 아니다.

사흘동안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 부활을 말한다.

20절. 유대인은 이해하지 못함. 성전은 14년에 시작해서 예수님 당시에도 완공안됨. 주후 63년에 완공되나 주후 70년에 무너진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거룩을 팔아 잇속을 차리는 종교지도자를 향한 경고였는데 알아듣지 못함

예수님은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나타내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3:1, 7:27 예수님은 그 제물이 되셨고 그분이 대제사장이었다.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성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오용되는 것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는 그 대상들을 사랑으로 품는 그 마음이 성전이다.

바울사도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 우리의 몸이 성령이 머무는 전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품게 만든다. 고전 3:16 

22절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살아나는 것은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능동태이다. 스스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예수는 죽을 줄 알고 선택하신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픔을 모두 짊어지고 스스로 잃어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깨달음에 시차가 있다. 아하 하는 순간이 뒤늦게 온다. 이것이 시차이다. 부모님이 떠나시고 나면 깨닫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내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성전 정화를 통해. 가장 거룩해야할 것이 타락했을 때 그것은 무너져야하고 새롭게 세워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임을 보여주셨다.











호세아서 개요 (바이블 프로젝트 참고)



호세아서 개요 




1-3장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
 
고멜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주라고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예언적 상징이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한 이스라엘은 간음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신실하심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이 포로신세가 되지만 회복에 대한 소망이 있다.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가문에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다.
반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혹독히 벌하시겠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스라엘의 죄보다 더 강력하다.
 
4-11장 이스라엘을 향한 고발과 경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원인과 결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예배와 십계명을 어기는 그들의 문제를 지적한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다른 신과 겸하여 섬기는 모습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고 군사력에만 의지하는 것이 재앙이 될 것이다. 
앗수르의 침략할 것이기 때문이다. 

12-14장 더 많은 고발과 경고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 불순종했는지 이야기한다. 
야곱의 거짓말과 배반, 이스라엘의 광야 반역, 이스라엘의 사울 왕 임명을 통해 이스라엘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11장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많은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은 반역한 아들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찢기지만 아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것, 14장 미래에 대한 소망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사랑하실 것이다. 
열방에 은혜를 나누는 울창한 나무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다. 
저자의 맺음말은 누가 지혜와 총명이 있어 모든 것을 이해할까?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자는 그 길을 걷지만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호세아의 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진리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치유와 구원이다.

예레미야서 개론 (예언서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 성서에서 예언서는 두루마리 네 개로 되어 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12소 예언서이다.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의 시대적 아픔과 희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말씀 언(言)자에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 말이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성경이다. 
예언은 결국 성경안에 있기에 성경을 읽고 깨달아야한다. 
예레미야는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점에서 예언을 외친다. 
유다 왕국의 멸망을 목격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살 길은 바빌론 포로살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숨어있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회개하고 돌아와 열매를 맺어야한다.







예레미야 -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선포자




예레미야는 바룩이라는 서기관을 통해 말씀을 기록했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미래의 소망을 선포한다.




1-24장 이스라엘을 향한 꾸짖음과 경고

핵심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상숭배를 간음에 비교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 곧 제사장, 왕, 선지자를 비판하며 불의가 만연한 사회로 과부, 고아, 이민자를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에서는 예루살렘(성전) 안과 밖의 삶이 다른 것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북쪽으로부터 적을 보내 성전을 허무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25장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70동안 지배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의의 진노의 잔이다.




26-45장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소망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한다.

30-33장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소망

하나님이 율법을 이스라엘의 마음에 새기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메시아를 통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할 것이다.

34-45장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







46-51장 열방을 향한 심판과 소망

46-49장 하나님이 바벨론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50-51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52장 파괴와 포로 곧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이다. 소망의 약속이 있다.








성경구절 (한국어/ 영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e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That is why, for Christ’s sake, 
I delight in weaknesses, in insults, in hardships, in persecutions, in difficulties.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2 Corinthians 12:9-10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욥기 (의인도 고난을 당하는가?) -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공의?

의인도 고난?

하나님의 위대하심

우리의 한계인정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

그러나 당당한 믿음

욥의 친구를 꾸짖음





욥기!

같은 성경 말씀인데 이제는 완전히 다르게 읽혀집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더 처절하게 더 간절하게 말씀을 읽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응보로 일까요?

창세기, 출애굽기 등 구약의 말씀을 읽다보면 세상은 인과응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그런데 욥기는 거기에 질문을 제기합니다.

의인도 고난을 당하는가?






욥기 통독을 하기에 앞서 욥기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욥, 아내, 욥의 세 친구, 엘리후 가 있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도 등장하시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항상 뭔가 시원치 않게 끝난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읽을 때마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습니다.

뭔가 굉장한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읽다보면 머리가 아픈 책이죠.

욥의 말이 옳은 것 같다가 친구들의 말이 옳은 것 같다가...

그러다가 하나님이 갑자기 등장하시니 뭔가 시원한 대답을 해주실 것 같아 기대하죠.

그런데 뭔가 해결된 듯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이 납니다.


의로운 자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주를 이루는 책이 욥기이죠.


그동안 유대인의 신앙에서 (우리도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인과응보의 원칙이 있었죠.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벌을 주신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이었던 욥의 고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자신의 고난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지 않거나 불의하신 분이죠.


친구들은 욥이 죄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죠.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계속해서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오락가락합니다.

마치 제 모습 같습니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려고 발바둥치는...

하나님을 향해 비난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애쓰죠.


갑자기 등장한 엘리후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죠.

그렇지만 욥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죠.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왜 고난이 존재할까?

하나님은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오직 하니님을 믿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욥의 친구들을 꾸짖고 욥을 인정하십니다.

그의 수고와 아픔을 인정하시는 것이죠.

그것의 욥의 기도였던 것이죠.

욥의 가족과 재산을 회복시키시지만 완전히 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하지요.

욥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공의,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 등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모두 이해하려는 것이 교만이었던 것이겠죠.


저도 제 고난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나눕니다.

그리고 힘을 얻고 소망을 얻습니다만

다시 넘어지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원망도 합니다.

이런 저에게 욥기는 또 하나의 소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마치 욥과 같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이 제 기도가 됩니다.


욥기를 읽으며 하나님 앞에 지극히 작은자 임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해 괴로워하고 때로 원망하더라도,

그럼에도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계시다는 믿음,

그 믿음만은 변치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거든요.

그래서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저도 중보기도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낫게하신다고 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눈먼자를 고치실 때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욥기에서 해결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내 지식과 지혜로 완전히 알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욥기를 읽으면 이해가 쉽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가 한번쯤은 다 했던 말입니다.

신앙적인 고백, 질문, 외침, 기도....


우리의 어리석은 질문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도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