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3-22 성전정화 (김기석 목사님의 성서학당 요한복음 정리)

성전정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과 성전정화사건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뜻

어린양의 희생, 피흘림으로 이스라엘이 죽음을 면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과도 연관된 날이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고 시비걸던 사람들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헤롯성전은 없었다. 이미 없어졌다. 주후85-90에 쓰여졌다고 봄.

성전이 있을 때 중심은 제사장

성전이 무너지면서 회당이 세워졌고 회당의 중심은 가르치는 자, 랍비였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정화는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가 혼인 예식으로 나타남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새로운 언약이 맺어짐을 보여줌.

그 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 그래서 2장에 배치되었다.

이야기를 어디에 배치하냐에 따라 낯설게 보고 새롭게 깨닫게 한다.

다른 공관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 후반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비유하시는데 종교적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신다.

겨자씨, 여인의 누룩, 어부의 물고기 고르는 것에 비유하신다.

그안에 심오한 내용이 담겨있다. 종교적언어를 사용하지만 깊이가 없다. 

우리는 거룩한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 삶에 변화가 없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인자한 하나님을 표현하신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죽으라는 뜻.

그런데 성전정화에서는 예수님이 폭력을 사용하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

이방인의 뜰 - 여인의 들 - 이스라엘의 뜰 - 제사장의 뜰 -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지성소

계층이 있다.

이방인의 뜰에서 상 행위가 이뤄졌다. 왜?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올때 먼 거리를 짐승을 데리고 올 수 없으니..

기드론 골짜기 감람산에 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그 시장을 성전 안으로 들여온다. 자리세 등을 받아서 성전이 부유해진다.

돈 바꾸는 사람들은 왜 필요한가. 성전에 내야하는 세금이 반세겔이었다. 은 5.7그램.

성전세를 내지 못하니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세겔은 성전에서만 사용하니 그것을 환전해야했다. 그것을 환전하며 수수료를 받았다.

성전이 돈벌이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제물이었다. 헌금이 그만큼 조심히 사용해야하는 이유.

받을 때는 한번 기도하더라도 사용할때는 두번 기도해라.

종교가 돈벌이에 눈을 돌리면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

이단 종파의 전도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해야할 성전이 타락한 모습에 분노하신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마가11:17 하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돈버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에 분노하셨다.

순교자 카즈 뭉크(Kaj Munk)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교회의 상징은 사자, , 비둘기 그리고 물고기였다. 하지만 번도 카멜레온이었던 적은 없다.”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거룩한 분노이다.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내쫓으시고 쏟으시고 엎으셨다. 2:15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성전이 아닌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심. 하나님의 깊이 연결되어있음. 그래서 하나님을 잘못되게 사용하고 소비하는 것에 분노하심.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장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 벌이를 위해 하는 것, 동기가 다르다.

17절  시편69:9을 인용. 시장으로 변한 종교, 죽은 종교라는 것. 성전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교회를 신의 무덤이라고 표현했던 것.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로 그들의 권위를 부정했다.

18절 대제사장이 허락한 시장을 부정한 예수님께 권위를 묻는다. 대제사장보다 높은 것은 하나님뿐인데 그럼 네가 더 높냐?

예수님의 행동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행동의 문제만 삼는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을 문제 삼는다. 예수님이 제기한 문제를 보지못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묻는다. 

19절 성전을 헐라

더이상 거룩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은 무너져야한다고 말씀하신다. 청파교회가 건물을 짓고 헌당하는 날 설교를 '이성전을 허물라' 라고 설교한 목사님. 본질을 놓치면 성전이 아니다.

사흘동안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 부활을 말한다.

20절. 유대인은 이해하지 못함. 성전은 14년에 시작해서 예수님 당시에도 완공안됨. 주후 63년에 완공되나 주후 70년에 무너진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거룩을 팔아 잇속을 차리는 종교지도자를 향한 경고였는데 알아듣지 못함

예수님은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나타내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3:1, 7:27 예수님은 그 제물이 되셨고 그분이 대제사장이었다.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성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오용되는 것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는 그 대상들을 사랑으로 품는 그 마음이 성전이다.

바울사도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 우리의 몸이 성령이 머무는 전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품게 만든다. 고전 3:16 

22절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살아나는 것은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능동태이다. 스스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예수는 죽을 줄 알고 선택하신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픔을 모두 짊어지고 스스로 잃어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깨달음에 시차가 있다. 아하 하는 순간이 뒤늦게 온다. 이것이 시차이다. 부모님이 떠나시고 나면 깨닫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내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성전 정화를 통해. 가장 거룩해야할 것이 타락했을 때 그것은 무너져야하고 새롭게 세워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임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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